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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전사태에 되새겨보는 물의의미
작성자 :
배승철
날짜 :
2011-04-04
오랜만에 우리지역의 명산인 모악산에 올랐다. 모악산은 수왕(水王)을 품고 있다 하는데, 수왕은 수명을 관장하는 생명수를 뜻하며 생명과 건강에 갈증을 느끼는 뭇사람들이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 모악산을 찾는다. 모악산은 또한 삼천천, 동진강, 만경강의 발원지로서 금만평야를 적셔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우리지역의 영산이다. 이처럼 모악산이 가지는 물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일본 원전 사고에서 보듯 요즘과 같은 환경파괴의 시대에 물이 우리 인류에게 주는 철학적 의미를 한번쯤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스 밀레투스학파의 탈레스(Thales, BC580)는 “모든 사물의 일차적인 원리와 근본적인 본성은 물이다”고 말하며 다른 어떤 요소보다 물의 중요성을 일찍이 강조했다. 고대 중국의 관중 역시 “물이란 무엇인가, 만물의 본원이며 재생의 종질이다”고 하였다. 주지하듯이, 고대의 중국인들은 수, 화, 목, 금, 토의 다섯 가지 물질이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물은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물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풍수학을 발전시켰다. 풍수학의 개념에서 물이 특히 중요한 것은 우물과 강, 시내, 호수, 연못 등이 ‘상서로운 기’를 품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처럼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물은 그 존재 양식의 변화무쌍과 기능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 사고의 보편적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물은 그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인해 단순히 철학적인 사유의 대상으로 한정되지 않고 신앙의 대상이 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원래 거대한 물덩어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을 신적인 존재로 여겼으며 강, 호수, 우물 등에는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밖에도 물의 신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와 힌두 문명 뿐 아니라, 켈트와 북미 인디언 등의 문화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우리 민족의 물에 대한 신앙은 ‘새벽 샘물에 담긴 가장 맑은 처음의 순수’이며 그 자체로 ‘존재의 모태’일 수밖에 없는 정화수에서 잘 드러난다. 약수(藥水) 신앙 역시 정화수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다. 물은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을 세 번 뿌리는 우리의 정화의례는 바로 물이 정화의 신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물의 신앙은 수신제와 기우제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기우제는 단순히 하늘뿐만 아니라 수신(水神)에게 비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물에 대한 신앙을 잘 엿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와 깊고 넓은 접점을 갖고 있는 종교들의 상징체계를 통해서이다. 불교의 계욕(禊浴)과 관욕(灌浴)은 구도자(求道者)가 궁극적인 존재양식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물에 의한 정화의 행위이다. 청수(淸水)를 놓고 주문을 외며 행하는 천주교의 정수치성(淨水致誠)은 정화수 치성과 매우 닮아있다. 한편, 재생을 상징하는 기독교의 세례 혹은 영세 또한 물이 가지고 있는 정화와 재생의 기능이 의례를 통하여 신성화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물 신앙이 최고로 발현된 것은 우리의 토속 민중종교라고 여겨지는 10여개의 종교들이 ‘물법신앙’이라고 불려지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예컨대, 봉남교에서는 교조가 하늘로부터 받은 ‘법수(法水)’로 치병(治病)을 한다. 이들 물법계통의 종교에서 물은 결국 치병의 힘을 가진, 부정과 사악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천지 조화력을 가진 그리고 재생력을 가진 성수인 것이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일상과 늘 함께 존재하는 물은 이처럼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물에 대한 철학적 담론도 따라서 중층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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