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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칼럼
스페인에서 '약속과 신뢰'를 배우다
작성자 :
김연근
날짜 :
2015-04-20
해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해외연수에 다녀왔다.
그동안 의원 국외여비에 발목이 묶여 동남아를 전전했던 것을 탈피해 소위 선진지를 시찰하자며 1년간 연수비 마련 적금을 부어 우리 행정자치위원회가 선택한 나라는 유럽의 부호, 스페인이었다.
수백 년을 내다보고 지어진 건축물, 정갈하고 절제된 도시, 웅장한 역사 속의 유품들, 의전이나 형식보다는 좀 더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을 향한 정부의 약속….
스페인의 이런 모습에서 연수기간 내내 뇌리에 맴돌았던 유일한 단어는 ‘신뢰’였다. 스페인은 느슨하고, 여유로워 국민에게 했던 약속은 오늘 못 지키면 내일 지켜도 될 것처럼 보였지만 국민에 대한 약속만큼은 철저했다.
대한민국의 KTX와 스페인의 아베(AVE)는 프랑스산 떼제베(TGV)를 모태로 태어난 고속열차이다.
AVE(Alta Velocidad Espanola)는 높은 속력의 스페인, 또 “새”(ave)를 의미하는데, 1992년 마드리드에서 세비야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처음 개통된다. 도입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고속열차인 아베의 효율성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보이며 반신반의했고, 이에 스페인 정부는 “아베가 시간을 어길 경우 전액 환불 조치하겠다”고 공언한다. 그 후, 아베는 국민과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시간엄수를 아베의 생명으로 생각하고 운행했고 지금까지 단 한차례의 환불도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민적 신뢰에 힘입어 아베는 2008년 바르셀로나까지 확장되고 지금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왕래하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고속열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국민적 신뢰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KTX는 어떤가. 66분 만에 서울과 익산을 오갈 수 있다며 10년을 기다리게 한 정부가 하루 48편 중 단 1대만이 이 시간 안에 운행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베와 KTX는 같은 교통수단이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서비스의 만족도에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스페인 아베(AVE)는 국민적 약속과 신뢰가 우선이었지만, 대한민국의 KTX는 ‘홍보’가 우선이었고 약속과 신뢰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선(先, 善)인지 생각조차 없는 듯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 그리고 신뢰를 잃은 정부, 그 정부가 국민을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는 그저 그런 서비스일 뿐이다.
이렇게 정부의 정책에는 ‘신뢰’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느낄 때쯤 또 하나의 풍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공공시설 어딜 가도 흰 벽에 붉은 소화기가 장식처럼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공공장소 어디서든 소화기를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걸어둬, 국민들에게 화재와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켜 주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소화기를 생활 밖의 물건이 아닌 것으로 각인시킴으로써 사람과 친숙한 위치에 걸려져 있었다.
이렇듯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직결되는 안전과 화재에 대해서도 우리와 차이가 분명했다.
우리의 소화기는 되도록 보이지 않는 바닥 모퉁이에 방치돼 있거나, 소화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문으로 가려지거나 사무실 환기를 위해 열린 문을 고정하는 묵직한 받침대 따위로 여기는 먼지 탄 소화기와 대조적이었다. 성능과 성분 면에서 같은 소화기이지만 공공장소의 효용면에서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안전을 예비하며 바닥 모퉁이가 아닌 공공성과 실용성을 겸할 수 있도록 소화기 다는 높이와 위치를 실험해 봐야겠다는 것이 이번 연수 중 각인되었던 하나의 테마였다.
역사적 문화유산이 많은 곳답게, 화재 예방시설에서도 많은 고심을 한 흔적이 엿보였다. 대로(大路)는 물론, 좁은 골목길 바닥 밑엔 하수구처럼 소화기 노즐을 설치해 손쉽게 화재진압이 가능하도록 해놓았다. 혹시 “소방차가 길을 비켜주지 않으면 그것을 강제할 수단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우리의 질문에 그라나다 시(市) 소방서장은 “강제할 수단 같은 것은 없습니다. 소방차가 지나가면 거리를 운행하는 차들에서 자연스러운 ‘모세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국과 같이 예의가 바른 나라에서는 우리보다 길을 더 잘 비켜주지 않을지 생각합니다” 라는 답변에 우리는 너털웃음을 웃고는 돌아섰다.
공공기관의 존립목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공공기관은 ‘공공의 질서와 국민의 안녕’이라는 공익을 창출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줘야 하는 커다란 보호막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이를테면 국민의 안전은 국가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제공해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스페인이 지난 수세기동안 세계의 대국으로 또 현재엔 관광대국으로 굳건히 있을 수 있는 점도 이렇듯 ‘신뢰’와 무관하지 않음이 자연스레 체득되었다.
국민을 향한 정부의 약속과 신뢰. 세월호 1주년을 맞은 이 시기에 우리가 다시금 바로 세워놓고 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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