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하는 의회, 함께 만드는 전북전북특별자치도의회
도의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 사무실에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도의원이 되었을 때 지인분이 써주신 글씨인데 서예에 정통하지 않은 내가 봐도 예서 특유의 조형미를 살린, 은은한 묵향이 느껴지는 작품인지라 감사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다.
민망한 것은 글씨를 받아서 방 안에 걸어놓고 난 이후에 글씨를 제대로 들여다본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다. 바쁜 의정활동을 핑계로 대기에는 옹색하다. 아무리 바쁘게 지내면 뭣하겠는가. 결국 일상의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처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 아닌가.
세밑, 놓친 일은 없는지, 안부 한 번 묻지 않은 사람은 없는지 등등 복기할 일이 많다. 얼마 전 2017년도 도의회 마지막 본회의가 있던 날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한 해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벽에 걸린 파사현정이 눈에 들어왔다. 많고 많은 성현의 글귀 중에서 굳이 파사현정을 골라 써주신 뜻이 있을 텐데 정작 나는 파사현정의 뜻을 새겨보기는 커녕 제대로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다니. 많고 많은 일들 중에 정작 내가 돌아보고 성찰할 일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파사현정은 애초 불교 가르침에서 유래된 말이지만 그릇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승려와 불자에게는 불법(佛法)으로 향하는 길로서 깊은 뜻이 있겠지만 부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사인으로서 또는 공인으로서 마땅히 새겨봄직한 가르침이다.
내가 도의원이 되면서 받은 파사현정에는 허툰 정치에 눈길 돌리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도의원 직분에 충실하라는 코드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말인데 올 한 해를 성찰해보자니 내가 과연 그랬나 하는 의구심이 밀려온다.
임실군민을 대표해서 도의회에서 의정활동을 하는데 임실군 대표로 제 역할을 한 것인지, 나아가서 도민들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일조는 한 것인지. 상임위원장으로서 위원회는 성공적으로 이끌었는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자문자답 해보려고 하는 자세일 것 같다. 어차피 자기성찰에 대해서 스스로 100%의 확신이나 긍정을 갖지 못한다면 무언가를 화두로 잡은 채 쉼 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그 화두가 방안에 걸려 있는 파사현정이었어야 했다. 거창한 것만 복기하려고 하기 보다는 일상의 공간을 세심하게 보는 촘촘함으로 글씨를 보고 그 뜻을 새겼어야 했다.
내년 한 해, 방안에 걸려 있는 파사현정의 뜻을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파사현정 네 글자를 이루고 있는 획 하나 하나를 따라 유심히 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다. 그리고 묵음으로 마음 속 독송(讀訟)하듯 파사현정을 되뇔 것이다.
그래서 내년, 또 다른 세밑에는 내가 깨트린 삿된 것은 무엇이고 드러낸 바름은 무엇인지 내 자신과 제대로 맞닥뜨려보고 싶다. 그것이 설령 내 자신의 민낯을 스스로 확인하는 불편한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춘풍추상(春風秋霜) 즉, 상대방에게는 따듯한 봄바람처럼 대하되, 스스로에게는 가을 서릿발처럼 엄히 대하는 자세가 결국 내 직분에 충실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2017.12.26 전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