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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탈식민 이정표

작성자 :
총무담당관실
날짜 :
2020-09-03
지난 8월 29일 토요일, 전주덕진공원에서 김해강 단죄비 제막식 행사가 열렸다. 코로나 확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아쉬움보다는 우여곡절 끝에 단죄비를 세우게 된 기쁨과 함께 앞으로 제2, 제3의 단죄비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참석자들 사이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김해강 시비가 전주시민의 오랜 쉼터 덕진공원 중심에 세워진 것은 1993년 4월이었다. 시비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김해강은, 전북이 배출한 걸출한 시인이었고 후학 양성에도 힘쓴, 지역이 ‘자랑할 만한’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지울 수 없는 친일의 기록은 은폐되었다. 친일행적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나와도 당시의 불가피한 시대상황이나 김해강의 문학적 궤적 전반을 균형 있게 살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친일청산에 관한 논란은 대개의 경우가 이런 패턴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견이 표출되면 친일행정은 논란꺼리가 돼버리고 자치단체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주저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친일청산은 역사적 과업에서 상투적인 이슈로 전락해버리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피로도가 누적된다. 친일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는 반민족 세력이 원하는 흐름이다.

식민지배가 종식된 지는 75년이 지났지만 탈식민 의식은 아직도 소년기에 머물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대목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지쳐 잊고 살기 십상이다. 이번 김해강 단죄비 제막식과 같이 탈식민을 향한 이정표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문제를 천착하면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우직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건재하다는 것이다. 이번 김해강 단죄비를 세우는 데에도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가 흘려온 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와 경의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친일청산 작업은 순간순간이 또 하나의 시작을 예고하는 작업이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 미당 서정주나 인촌 김성수만 해도 아직도 지역사회의 저항이 크다. 공과 과를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 공과 과를 균형 있게 보는 게 중요하다면 지금까지 그들이 남긴 친일과 반민족 행위라는 역사적 과(過)는 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외면하려고만 했는지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식민지배 이후의 시대, 명백히 2020년도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다. 탈식민의 시선으로 식민지배를 재구성하고 극복하는 일은 이미 과거완료형이 됐어야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식민지배 이후의 시대를 구상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좌절된 후유증이 이렇게나 큰 것이다.

김해강 단죄비 제막행사가 있었던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이었다. 이제는 강력한 주권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도 우리나라의 저력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만 친일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데에는 이제 겨우 반 걸음 땠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또 다른 국치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병도 전북도의회 의원 / 전북일보 2020.09.0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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