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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백아산(810m)에 올랐다. 희끗희끗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마치 흰거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처럼 보여 ‘흰거위산’이라는 불리는 산이다.
휴가 때면 으레 명산을 무박 종주하곤 하는데 이번 새해 연휴엔 백아산을 택했다. 얼마 전부터 정지아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열독 중이다. 오랜만에 삘이 꽂힌 책이다. 잠들기 전과 눈을 뜬 후 그리고 화장실에서 읽었다. 의정활동으로 전주에 갈 때도, 행사로 서울에 갈 때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그러면서 이 책을 마치면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질 때처럼 허전할까 봐 하루에 2페이지 이상 읽지 않았다.
필자와 동갑내기인 정지아 작가는 뻘치산을 부모로 둔 딸이다. 이름 ‘지아’는 어머니가 주로 활동했던 지리산의 ‘지’와 아버지의 활동무대였던 백아산의 ‘아’를 따서 지어졌다고 작가는 말한다. 2006년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위편삼절이 되도록 읽은 후 야생곰과 싸울 단검과 김밥 한 줄만을 들고 단독으로 지리산 야간 무박종주(성삼재~백무동, 35km, 15시간)했었다. 2023년은 정지아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읽고 후배들과 단일치기(14km, 5시간)했다. ‘이현상 평전’이 제삼자에 의한 영웅전기였다면 ‘빨치산의 딸’은 빨치산 집안의 생생한 가족사다.
작가의 부모는 평범한 철도청 직원과 아낙으로 살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경찰에 쫓겨 입산하게 되어 간난신고의 5년 여 동안 빨치산 삶을 겪게 된다. 휴전 후 위장 자수를 하다 발각되어 20년 수감하게 된다. 석방된 후에도 끊임없이 감시를 받는 과정을 엮은 빨치산의 고난과 동지애 그리고 가족의 수난사이자 한 세대의 시대사다.
한국 현대사에서 빨치산은 남과 북에서 버림받은 역사의 미아다. 앞으로 남북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에 반드시 재평가받아야 하고 재조명이 필요한 세계사에서 가장 영롱한 투쟁사이자 한민족의 위대한 대서사시다. 근현대사 유격전의 대명사인 중국 마오쩌둥의 장정은 광활한 남서부의 11개 성을 배후지로 1년간의 장개석과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반면에 한국의 빨치산은 기껏해야 지리산을 위시한 한반도 남반부의 산악에 고립된 채로 장장 5년여 동안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은 치열하고도 처절한 민중의 투쟁사이자 민족의 비극사다.
남부군 대장 이현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가 전투 중 죽었거나 자폭했다. 숱한 유. 무명의 빨치산들이 기꺼이 죽음을 불사했던 것은 민족해방과 인간해방을 꿈꾸는 피보다 붉은 거룩한 이념이 순결한 신념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념이란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이고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고작 골고루 잘살자는 소시민의 꿈에 불과하다. 상놈과 조선놈이라서 차별받고 소작농과 여자라서 멸시받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각자도생의 21C 남한 사회에서 빨치산 이야기는 머나먼 고조선이나 철지난 이데올로기 시대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영하 30도 엄동설한에 토벌대에게 토끼몰이 당하며 죽어간 청년들의 조국통일을 향한 순교는 분단 80년이 다가오도록 이산가족 상봉 상례화 조차 해결하지 못한 남북한 위정자들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
“윤석열 대통령님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님, ‘빨치산의 딸’을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백아산을 오르내리며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등한시 한 채로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두 분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염영선 전북도의회의원 / 전북일보 2023.02.0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