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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은 동학농민혁명 고부봉기 129주년이 되는 날이다. 불현듯 고부에 살았던 용희와 정기라는 6척 장신의 친구가 생각나는 것은 서글픈 역사의 기억에 쓰라린 개인의 추억이 혼재되어서 일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용희는 친구가 아니다. 초등학교 때 단 한 번 만난 동갑내기다. 여름방학에 고부에 사는 고모댁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70년대는 권투가 최고인기 스포츠여서 집집이 글러브가 있었고 동네마다 미니 권투대회가 열렸다. “용희야~자가 키는 작아도 시내 상리의 골목대장잉게 함 붙어봐라.” 사촌형이 뒷동산 임시 특설링장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다짜고짜 싸움을 붙였다. 용희는 헤비급이고 나는 라이트급이지만 싸움에는 나름 자신이 있어 링에 올랐다. 오메~시상에 3회전이 그리 긴줄 그때 처음 알았다. 입술은 터지고 코피는 질질 흐르고 눈은 시퍼렇게 멍들었다. 사촌형은 그날 고모에게 몽둥이찜질 당했다.
정기는 고3 단짝인 거구다. 교복이 짧아 칠보바지처럼 입고 다녔고 발이 너무 커 맞는 신발이 없었다. 그 친구가 앞에서 걸으면 나는 뒤에서 뛰어야 했다. 정기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 6년 동안 저금한 돈을 받아 정읍 동초등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곱빼기로 시켜먹는 바람에 차비가 떨어져 10km가 넘는 고부까지 걸어가야 했다. 횡령이 들통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용희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서울 청량리에서 전국구 건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마지막이다. 정기는 대학 갈 형편이 못되어 교도관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교도소 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퇴직 후 아직껏 자리를 못 잡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후예들의 말로다.
1894년 오늘,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농민군들이 조병갑의 횡포에 못 이겨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이 고부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무장기포와 백산 봉기가 일어났고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 전주성을 점령, 전주화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후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배할 때까지 남원과 삼례에서 재봉기 후 전라도를 넘어 충청도,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까지 부패한 정부와 외세에 맞서 결연히 싸울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1906년 고부초등학교가 건립된 이후 관아 건물이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는 반정부, 반외세의 상징적 장소 대부분을 철거, 민족의 정기를 말살했다. 지금은 운동장 한켠 초석과 기단석 그리고 오래된 고목이 이곳이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말해주는 전부다.“동학농민혁명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혁명이며, 민주주의 정신과 일치된다. 3.1운동과 4·19 혁명정신은 동학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며 1980년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자후를 토했다. 이러한 한민족의 저항정신과 민주주의 뿌리인 동학농민혁명의 단초가 된 혁명의 땅, 고부를 이토록 방치한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방기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그 역사를 반복한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명언이 오늘날처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다. 고부관아가 하루빨리 복원되어 무능·무책임·무도한 위정자는 반드시 징치된다는 칼침을 주어야 유권무죄 무권유죄, 무치의 법치주의가 칼춤을 추지 못할게 아닌가.앞에서 얻어맞고 뒤에서 뛰어다녔어도 용희와 정기가 그리운 건 비뚤어진 역사의 희생자인 친구들에 대한 동시대인의 빚이 아닐까.
염영선 전북도의회의원 / 전북도민일보 2023.02.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