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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현에서 고려의 충신 백장 선생과 교유하며 국사를 논했던 황희

작성자 :
의정홍보담당관실
날짜 :
2024-11-01

황희가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백장 선생(1342~1418)뿐이었다. 황희와 함께 장수의 2덕(德)으로 추앙받는 고려 후기 성리학자 백장 선생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태조와 태종의 명을 거절하고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가 유배지 장수 장계면 호덕동에서 여생을 마친 인물이다.

성은 백씨이고 관향은 수원인 선생의 휘는 장(莊)이요, 자는 명윤(明允)이며 시호는 충숙(忠肅), 호는 정신재(靜愼齋)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 좋아하고 총명했던 그는 1357년(공민왕 6년) 16세의 젊은 나이로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고 학문과 경륜을 쌓기 위해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366년(공민왕 15년) 원나라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해 벼슬을 얻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려로 돌아와 충심으로 임금을 모셨다. 그러나 이성계의 혁명으로 고려가 무너지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원주 치악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진 채 은거 생활을 한다.



그의 현명함과 강직함을 익히 알고 있었던 태조 이성계는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고 곁에 두기를 원했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왕명을 거역한 죄를 물어 충청도 해미로 귀양 보냈다.

1405년 태종이 또다시 친서를 내리고 이조판서 집현전 대제학을 제수하고 말(馬)까지 보냈지만 백장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습니다. 어찌 고려조의 녹을 먹은 신하가 두 마음을 품겠습니까?”하고 완강히 거부하니 해미보다 훨씬 더 먼 장수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했다.



그의 나이 64세에 장수현 땅을 밟은 백장은 성처럼 둘러싸인 푸른 산과 길고 맑은 물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한다. 또한 장수 사람들의 후한 인심에 마음을 정하고 식솔들을 이곳으로 불러 정착하게 했다.

백장은 경관 좋은 언덕을 찾아내 ‘청심정(淸心亭)’이란 정자를 짓고 학문을 익히고 담론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는 유서에 남기기를 모든 문서에는 고려조에서 받았던 벼슬만 쓰고 조선조가 내리는 모든 증직도 사용치 말라고 당부했다.



1418년(태종 18년) 그의 부고 소식을 들은 태종은 동방의 백이(伯夷)라 칭송하며 의정부영의정 겸 영중추부 및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 등을 추증했다.

당시 조정에서 파견 나온 예관이 백장의 치적을 훌륭히 여겨 한양으로 묘지를 옮기고 장사 지낼 것을 청했으나 후손들은 백장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장계면에 있는 선생의 묘소는 1999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0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묘지명에는 ‘유명고려국이부전서보문각대제학백장지묘’라고 적혀있다.



매산 홍직필이 지은 신도비 명에는 “나라를 팔고 임금을 팔아서 부귀를 드러내려는 사람이 많았다. 공과 같은 사람은 백번 죽어도 옮기지 않는 지조에 힘써 태조와 태종이 반드시 조정에 나오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드디어 정신과 기운을 편안히 함으로 잃지 않고 왕씨 조정에 바쳤다. 아! 이른바 멀어도 임금을 멀리하지 아니하고 죽어도 나라를 잊지 아니한 분이시다.”라고 백장의 충정을 칭송했다.



황희가 장수현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반가워했던 사람은 백장 선생일 것이다. 비록 임금을 향한 충심이 다를지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같았고 죄인의 신분으로 만났으니, 동병상련이 아닐 수 없었다.

황희도 처음에는 고려 왕조만을 섬기며 72현의 관리들과 두문동에서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치려 했던 인물이었기에 백장 선생의 충절을 흠모해 왔다. 황희는 평소 존경하는 분을 직접 만난 기쁨으로 예를 다했고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시국을 논하기도 하며 소중한 인연을 이어갔다.



황희의 유배지로 알려진 도장골에서 백장 선생이 지내던 호덕동까지는 약 2km 정도였다. 둘은 도장골과 호덕동 중간지점인 위동마을에서 자주 만났고 백장 선생의 손녀사위인 퇴휴재 송보산, 손재 김남택과 같이 ‘청심정’에 올라 국사를 논하며 담론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후에 마을 사람들은 백장과 황희의 흔적을 간직하기 위해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예의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황희가 유배 기간 중 백장 선생과 교류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신도비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 “하루는 황 익성공이 달밤을 이용해 백장 선생이 계신 곳을 방문했는데 잠시 말을 타고 나간 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주인은 어디로 갔고 밝은 달만 뜰에 가득하구나.’하며 시 읊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장 선생을 기다리다 그냥 집으로 돌아왔는데 며칠 뒤에 백장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왔다.”라고 쓰여 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백장 선생의 죽음을 미리 황희에게 알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사이가 가까웠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 황희가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충숙공 정신재 백선생 묘갈명’에는 “옛적에 맹자께서 백이와 유하혜를 논하여 말씀하시기를 성인이 백세의 스승이다. 백세 위에서 크게 떨치면 백세 아래서 일어나지 않은 사람 없으니 완고하고 탐내는 사람은 너그러워지며 경박한 사람은 인정이 후해지나니 정신재와 같은 사람은 진실로 그 유풍을 들은 사람이니라. 백세의 아래에서 공의 그 유풍을 들어 일어나는 사람이 어찌 없으리오.…… 학문은 크고 맑아서 좁지 않았으며 은혜롭고 부드러움을 배워서 능히 공손하였다. 대개 나아감에 도가 있으므로 올바르고 이 도는 치우치지 않고 조용하였다.”고 기록하며 애도했다고 한다.



김남택과 송보산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장수에 내려와 백장 선생과 황희의 충(忠)과 덕(德)을 이어가며 장수인이 되었다.

1828년(순조 28년) 예조의 인가를 얻어 사당 ‘월강사’를 세우고 장수유림의 표상이 된 백장 선생과 김남택, 송보산, 최경회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48년 복원되어 백장 선생의 둘째 아들 백여옥, 김남중, 송수산을 추가로 배향해 현재 7명 선현을 모시고 있다.

월강사는 장계면 월강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1986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되었다.


박용근 전북특별자치도의회 의원 / 새전북신문. 2024.11.0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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